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쓰메 소세키 (문단 편집) == 기타 == * 1984년부터 2004년까지 일본 [[일본 엔|1천 엔]] 지폐의 모델이었다. 이전까지 일본은 패망 이후 1963년에 [[이토 히로부미]]를 1천 엔 지폐의 모델로 사용했으나 주변국들이 맹렬히 반발했다. 그런 반발을 무시하고 사용했지만 1984년 1천 엔 지폐의 모델을 [[이토 히로부미]]에서 나쓰메 소세키로 변경하여 2004년 말까지 사용했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이자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 대신 전사한 나쓰메 요시노부가 그의 조상이다. 요시노부의 차남 요시히사의 아들 요시유키가 그의 직계 조상이다. * 그의 필명 소세키라는 말은 한자로는 [[수석침류|돌로 입을 헹군다]]는 의미이다. 진서에 나오는 고사를 인용한 것으로, 본래 안빈낙도의 생활을 의미하는 '돌을 베고 시냇물로 입을 헹군다.'는 표현을 어떤 사람이 잘못 인용하여 '시냇물을 베고 돌로 입을 헹군다.'고 하여 남들이 비웃자, '시냇물을 베개로 삼는다는 것은 더러운 말을 귀에서 씻는다는 의미이고, 돌로 입을 헹군다는 것은 속세의 일을 버린다.'는 비유라고 우겼다는 데서 나온 말로, 말장난을 하거나 무리하게 억지를 쓰는 것을 일컫는다. 일종의 말장난을 아호로 삼은 것. * 일본에서 [[제인 오스틴]]을 최초로 높게 평가한 인물이다. 소세키의 1907년 저서 『문학론』에서 "오스틴을 감상하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도 현실주의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썼다. * 당연하겠지만 당대 일본 최고의 인기 작가였다. 1909년에는 당대 손꼽히는 잡지 ‘태양’의 작가 투표에서 1등을 차지한 인물이기도 했다. * 2000년 [[아사히 신문]]에서 '지난 1천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은 누군가?'라는 설문조사에서 1위를 기록했다. 2위는 [[무라사키 시키부]], 3위 [[시바 료타로]], 4위 [[미야자와 겐지]], 5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6위 [[마츠오 바쇼]], 7위 [[다자이 오사무]], 8위 [[마쓰모토 세이초]], 9위 [[가와바타 야스나리]], 10위 [[미시마 유키오]]였다.[[http://info.asahi.com/guide/sp/soseki/contest.html|#]] * [[영어]] 문장 'I love you'를 '[[달이 아름답네요]].'(月が綺麗ですね)라고 번역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문서 참고. * 장남 나쓰메 준이치는 [[바이올리니스트]]였다. 도쿄 필하모니 교향악단의 악장을 지냈다.[* 후배 대문호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3남 아쿠타가와 야스시도 작곡가 겸 지휘자로서 유명 음악가가 되었다.] * 빼빼마른 외모와는 다르게, 엄청난 [[대식가]] 였다. 게다가 예민한 신경 탓에 신경성 위장병을 앓았음에도 불구하고, 식탐이 많아서 배가 아픈 와중에도 꾸역꾸역 입 안에 먹을 것을 집어넣었다고 한다. 위장병으로 입원했을 때 배를 따뜻하게 하기 위해 배 위에 올려놓은 [[곤약]]을 떼어먹었을 정도였다. 달콤한 음식을 즐겨서 단팥을 좋아해 양갱, 단팥빵을 무척이나 즐겨먹었고, 특히 딸기잼을 매우 좋아했으며, 영국에서 고급재료로 제조해, 대량으로 주문한 것들을 한 달에 8캔, 어떨때는 한 번에 딸기잼 한 통을 다 먹었을 정도 였다고 한다. 때문에 심각한 당뇨병과 치아 건강도 나빠져 치주농을 앓기도 했다고… 그럼에도 집에는 서양 문물인 [[아이스크림]] 제조기를 구비해서 제조한 아이스크림에 토핑으로 딸기잼을 얹어 먹었을 정도였다.[* 타임보칸 24 시즌 2에서 나온 내용.] 심지어 의사가 단 것을 이 이상 먹지 말라고 처방을 해서 가족들이 간식들을 숨겨놓았음에도 어떻게든 찾아서 먹어댔으며, 추가로 문하생이었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경우 그의 집을 방문했다가 당시 가족들이 미처 숨기지 못한 밤을 까서 먹고 있던 것을 본 적이 있다는 증언을 한 바 있다.--이 정도면 중증 설탕 중독자.--공교롭게도 동시대의 대문호인 [[모리 오가이]]와 후배 대문호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도 그와 비슷하게 심각할 정도로 단것을 매우 좋아했다. * 어느 때인지는 모르나 꽤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나쓰메 소세키가 광장을 걷다가 한 남자와 부딪쳐서 책과 서류를 쏟았다. 그것을 보고 그 남자와 젊은 육군 소위가 책과 서류를 주워주는데, 이때 젊은 육군 소위는 훗날 A급 전범으로 처형되는 [[도조 히데키]]였고, 부딪힌 남자는 [[안중근]]이었다는 것이다...인데 명확한 출처가 없고, 도조 히데키가 소위였던 기간이 1905년 4월~1907년 12월인데 이 당시 도조는 소위 임관 후 [[러일전쟁]]에 참전하고 [[황해도]]에 주둔한 부대에 근무하고 있었고, [[안중근]]은 상하이에 다녀온 후 고향 황해도에서 계속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다니구치 지로]]의 만화인 《도련님의 시대》 1권에 나오는 일화이나, 이 만화에서는 소설적 재미를 위해 각색한 일화가 많기 때문에 실제 벌어진 일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이 일화가 사실이라고 전제한다면 안중근이 일본에 갔다는 기록은 없기에 최소 일본에서 있었던 일은 아니었을 것이고 만주나 조선에서 있었을 것이다.] 반면 나쓰메 소세키는 교직 때문에 계속 일본에 있었고, 만주와 조선을 여행 온 것은 그 이후인 1909년도의 일이다. 해당 일화는 나쓰메 소세키를 다룬 만화 [[도련님의 시대]]에 등장하기 때문에 널리 퍼졌지만, 사실이 아니거나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해도 소세키가 아닌 다른 사람일 확률이 높다. 해당 책 기준으로는 '''해당 시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고증오류를 감수하고 창작했다'''는 평이 많은 듯. *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는 소세키의 풀베개를 좋아했다. 말년에 자신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일부분을 낭독 한 바있다. * 현실적이고 이지적인 지식인의 이미지가 있지만 의외로 [[괴담]]을 무서워하는 일면이 있었다고 한다. 가족들이 잠자기 전에 괴담 비슷한 이야기만 꺼내도 잠을 못 자니까 그만두라며 질색을 했다고.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나쓰메 소세키 장편.jpg|width=100%]]}}} || || {{{#fff '''장편'''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나쓰메 소세키 단편.jpg|width=100%]]}}} || || {{{#fff '''단편, 수필, 평론집''' }}} || * [[독서 마이너 갤러리]]에서 소세키 책 읽는 방법을 정리했다.[[https://m.dcinside.com/board/reading/110870|#]] [[4chan]] /lit/에서 만든 버전도 있다.[[https://4chanlit.fandom.com/wiki/Category:Natsume_Soseki|#]] * 그의 출생지는 현재의 [[도쿄]] 신주쿠구 와세다에 있는데, [[요시노야]]가 되어 있었다가 현재는 야요이켄이 되어 있다.(...) 그래도 식당 앞에 비석이 하나 남아 있기는 하다. [[파칭코]]가 되어 있는 이케다야 등과 함께 일본 내에서 미비한 문화재 보존을 한탄할 때 꼭 나오는 사례 중 하나. * 소설을 집필할 때는 소위 말하는 비축분을 마련하는 일이 없이, 항상 딱 다음날 신문에 연재할 한 화 분량씩만 오전에 집필하고, 그 이상은 아무리 원고가 술술 풀리는 날이라도 집필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그런 식으로 하지 않고 원고를 며칠 치를 한꺼번에 쓰거나 하면 나중에 나태해지거나 슬럼프가 오기 쉽기 때문에 일부러 자기자신을 다잡는 의도로 그렇게 했다고 한다. * 그의 제자 중 한 명이자 수필가인 우치다 햣켄의 증언에 따르면 원고가 잘 안 풀릴 때면 자신의 콧수염을 하나씩 뽑아 원고 위에 늘어놓는 기이한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 콧수염은 나중에 우치다 햣켄이 주워가서 모아놨다가[* 소세키의 문하생들 모두 스승을 굉장히 존경했고 여러 모로 닮은 버릇들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긴 했지만 이 사람은 진짜 유별났다. 책상도 소세키가 집필하는 그 책상과 똑같은 것을 들여놓고 원고가 잘 써질 것이라고 좋아했다던가, 이런 저런 소세키 관련 컬렉션을 모으는 둥 굉장했다고.] 소세키 사후에 소세키의 부인에게 자기 컬렉션을 보여주기도 했다고 한다. 다만 안타깝게도 문제의 그 콧수염 컬렉션은 도쿄대공습 당시 불타서 사라졌다고. * 원고를 쓸 때 글의 흐름이 잘 풀리지 않는다거나 해서 못 쓰게 된 원고를 바로 폐기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타바타 문인촌 시절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방문했다가 그가 원고를 거절하던 광경을 목격했던 기록을 남긴 무로우 사이세이의 증언에 의하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고쳐 쓰기 전 원고도 한쪽에다 모아놓는 걸 보면서 왕년에 소세키 선생님도 그랬었다고 들었는데 스승에게서 배운 버릇인가보다고 평했던 적이 있다. * 교육자 출신답게 굉장히 자녀 교육에 엄격하고 신경을 많이 쓴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영국 유학 중에 태어난 장녀 후데코의 이야기를 편지로 쓰면서 ‘요조숙녀로 잘 자랄 수 있도록 교육에 신경 써 달라’고 아내에게 편지를 쓴 내용이 남아 있다. 다만 영국에서 돌아온 뒤 상술한 신경쇠약이 심해지면서 증상이 심할 때는 시끄럽다고 어린 자녀들을 연못에 던지기도 했던 적이 있는 등 심하게 공격적인 성향을 보일 때가 잦아서 자녀들이 아버지를 두려워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증상이 그렇게 심하지 않았을 때에는 아이들이 원고를 쓰는 소세키 옆에서 뛰어다녀도 신경을 쓰지 않는 면도 있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